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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안내

추사와 과천

과지초당 이미지

추사가 언급한 과천의 모습

두 번의 유배에서 풀려나 추사가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말년을 보낸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먼저 장기간의 유배로 인하여 경복궁 옆 월성위궁을 유지하지 못했거니와, 향리로 방축된 동생 명희와 상희가 과지초당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고하게 귀양살이를 했던 생부 김노경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도성에 가까운 과천의 과지초당에 자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부를 위해 두 번이나 격쟁을 하였을 정도로 효자였던 추사가 말년에 취할 수 있었던 적극적 선택이라고 하겠다.

'가을날 과지초당에 다시 오다(秋日重到瓜地草堂)'

문을 나서니 가을이 정히 좋아,
스님과 더불어 애련함을 다시 견디어 내네.
가물가물한 삼봉의 빛은,
어언간 다섯 해 전이로세.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늙어가고,
붉은 잎 점차 숲을 곱게 물들이네.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가네.

- 유배를 마치고 과지초당에 돌아온 추사 선생의 심정을 표현한 시

'산빛은 밥을 지어먹을 만하고 시냇물은 떠 마실 만하다.'

- 1856년 추사는 척질이며 제자인 이당 조면호(1803 ~ 1887)가 과천으로 이사 올 예정이라고 하자, 그 답장에서 어서 이사오라고 과천을 표현한 글

과천시절 주요 작품

대팽고회 대련

크기
129.5 × 31.9 × 2 cm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네.
이것은 시골 글방선생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최상의 즐거움이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한 큰 황금인을 차고, 몇 장 길이의 밥상에 심부름꾼과 시녀가 몇 백 명이라 하더라도, 능히 이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농을 위해 쓰다.
칠십일과(七十一果 : 일흔 한 살의 과천 사람이)

이 작품은 명말청초 동리 오종잠(1607 ~ 1686)이 지은 <가을 날의 집안잔치(中秋家宴)> 란 시를 추사 선생이 일부를 변용하여 1856년 가을에 쓴 <대팽고회 대련>이다. 서거하기 두달 여 전에 쓴 이 글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표현하여 추사 말년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불이선란도

크기
54.9 × 30.6 cm

김정희의 대표작 <불이선란도>는 난초에 대한 시각적 재현이라기 보다는 서예적 필묵의 운용이 만들어낸 독특한 묵란도이다. <불이선란도>는 그림보다 글씨의 비중이 더 많다. 제발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쓰였으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방식, 그림의 주인이 바뀌게 된 사연을 알려준다. 특히 제발은 그 위치와 글자의 진행방향을 그림의 전체적 균형에 어긋나지 않게 적절히 안배하였는데, 이는 김정희의 뛰어난 공간 구성능력을 보여준다. 서체의 특징과 제발의 등장인물로 보아 과천시절 작품으로 보인다.

붓 천 자루 벼루 열 개 편

작품년도
1856년
크기
32 × 44 cm

평생의 친구로 영의정을 지낸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로, 글씨에 대한 추사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칠십 평생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앵고 천 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습니다."

봉은사 판전

크기
73 × 213 cm

서울 강남 봉은사의 판전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추사 선생 최후의 유작이다. 보통 불경을 보관하는 전각을 대장각, 장경각이라고 하는데, 유독 이 곳만은 '판전' 이라고 부른다. 봉은사 판전은 1856년 남호 영기 스님이 조성한 80권본 화엄경소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추사 선생에게 현판을 부탁하여 쓴 것이다. 한 점의 속된 기운이나 조금의 기교도 없어 싫증이 나지 않는 작품으로 흔히 동자체라고 부른다.

과천의 추사 관련 유적

과지초당(瓜地草堂)

추사 선생이 과천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생부 유당 김노경(1766 ~ 1837) 이 주암동에 과지초당을 조성하면서 부터이다. 과지초당은 1824년 청계산 옥녀봉 아래 돌무께(현 주암동)에 마련한 일종의 별장이다. 과지초당은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의 역량을 상징하는 곳이다. 과지초당은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다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리웠다.
당시 김노경이 청나라 학자 등전밀(1795 ~ 1870)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저는 노쇠한 몸에 병이 찾아들어 의지가 갈수록 약화되는데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서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있습니다. 요사이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서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자못 정원과 연못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구축해서 '과지초당' 이라 이름하였습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아취를 느낄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 합니다(1824.11.20)" 라고 하였다.
1837년(현종3)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그 후 과천을 자주 찾아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3) 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과천시에서는 추사 선생의 삶과 예술을 기리고자 2007년 과지초당과 독우물을 추사로 78에 복원하였다.

독우물

추사 김정희 선생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머물면서 직접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다고 한다. 독우물은 독(항아리)을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 또는 옹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독우물은 과지초당과 더불어 과천 소재 추사 관련 유적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유당 김노경 묘터

돌무께 마을에서 청계산 등산로를 따라 옥녀봉 정상에 오르다 보면 약수터에서 우측으로 30여 미터 들어가 100여 평 남짓 되는 돌출된 평지에 생부 김노경의 묘터가 위치한다. 김노경의 묘역은 1968년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인근으로 이장되었다. 현재는 과천거주 박 모씨가 조성한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풍광이 좋아 서울 강남과 여의도 일대가 한 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마을 주민들은 그 산소를 '큰산소'로 기억하고 있다.

유당 김노경 묘터에서 바라본 서울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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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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