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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시 Gwacheo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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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제목 과천의 고개이름 / 남태령
    내용

    남태령(南泰嶺)은 과천시의 과천동(옛날의 下里)과 서울 관악구의 남현동(승방들:僧房坪) 사이에 있는 큰 고개이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을 넘는 고개로, 고개의 남서쪽에 관악산 정상, 북동쪽에 우면산 정상이 있다.
    옛날 한양(서울) 사람들이 충청도나 전라도로 갈 때 많이 넘던 고개로, 지형이 몹시 험해 이 고개를 넘으면 과천 읍내에서 쉬어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양에서의 남행(南行)길이 남태령과 과천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었음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 전라도로 나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다라서 … 동자기 밧비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
    『대동여지전도』 등의 다른 옛 지도를 보아도 서울에서 천안 삼거리 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과천을 통해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조선의 정조도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과천길을 주로 이용하면서 남태령을 넘었다. 정조는 한강을 주교로 건너 승방들을 지나 이 고개를 넘고 과천 읍내를 지나 사그내(지금의 의왕시 古川洞)로 해서 수원으로 가곤 했다. 수원으로 오가던 중에 자주 과천 읍내에 들러 쉬어 갔는데, 그 쉬던 장소인 온온사(穩穩舍)가 지금도 중앙동 사무소 옆에 있다.
    그러나 정조는 뒤에 길을 바꾸어 이 과천길을 피해 딴 길로 돌아간다. 즉, 노들나루(노량진)를 거쳐 시흥 안양을 지나 사그내로 갔다.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영의정 김상로의 동생인 김약로의 무덤이 갈현동 찬우물마을에 있어 그 앞을 지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태령은 여우가 많아 여수고개 또는 여우고개로 불리던 고개였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정조에 의해 지금의 이름인 남태령으로 바뀐다.
    정조의 행차가 이 곳에 쉬어 가던 어느 때, 임금은 수행하던 시종들에게 이 고개 이름을 물었다. 이 때 과천현 이방이던 변아무개가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자, 이미 이 고개 이름이 여우고개인 줄 알고 있었던 임금은 거짓말을 한 그를 나무라고 왜 남태령이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가 임금께 그 요망스런 동물 이름이 든 고개 이름을 감히 댈 수가 없어 갑자기 꾸며 서울 남쪽의 첫번째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이라고 아뢰었다고 하자, 이를 가상히 여겨 그 때부터 그가 꾸며 댄 이름대로 남태령으로 했다. 이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옛 문헌에 이 고개를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이라 했는데, 이것은 여우고개 또는 여시고개의 훈 음차이다. 여시는 여우의 사투리이다.
    이 고개는 옛날엔 여우와 뱀이 많아 혼자서는 감히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밤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옛날 과천현감 중엔 이 고개 밑에 유인막(留人幕)을 설치, 젊은이들을 파견해서 행인들을 고개 밑에 대기시켰다가 여러 명이 되면 호위를 해서 안전하게 고개를 넘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행인들은 호위해 준답시고 동행하는 그 젊은이들에게 노잣돈이 털리곤 해서 적지 않은 부담을 안아야 했다. 그들은 고개를 넘겨 줄 때 호위의 댓가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액수가 적으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행인들은 이 고개를 넘을 때 월치전(越峙錢), 즉 고개넘잇돈을 준비해 두고 넘어야 했다.
    이 고개는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북한군의 격전지였다.
    더구나, 관악산이 북한군의 산악진지여서 1951년에 국군이 재북상할 때 북한군이 필사적으로 이 고개를 방어하여 피차 많은 희생자를 냈다.
    또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갔던 피난민들이 북으로 다시 올라오다가 과천에 많이 머물렀는데, 그들은 관악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말려 땔나무로 만들어 지게에 얹어 밤중에 이 후미진 고개를 넘어서 승방들을 지나 서울의 검은돌〔黑石洞〕이나 사댕이〔舍堂洞〕까지 가서 팔기도 했다.
    이 고개엔 약 20여 년 전에 큰 길이 나서 서울과 과천 사이의 숨통이 크게 틔었으나, 그 후 통행 차량의 계속적인 증가로 교통 상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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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당자 : 문화체육과 신규정 (02-3677-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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