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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속 |
나빙 |
| 년도 |
1790.8.18 |
크기 |
10.4 x 12.2 |
유물 설명
정의
1790년 북경에서 박제가와 심교한 나빙(羅聘, 1733~1799)이 전별 기념으로 그려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초상화.
기본사항
일본의 추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구장(舊藏)했던 작품으로, 현재는 작품의 소장처를 알 수 없으며, 이 흑백사진은 후지츠카가 촬영한 것이다.
내용
1790년 북경 연행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머물던 박제가는 그의 북경 관소였던 유리창의 관음각(觀音閣)에서 나빙을 여러 차례 만나 우정을 나눴다. 나빙은 청나라 건륭 연간[乾隆, 1661~1722]에 상업 도시였던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에서 활동한 양주팔괴 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박제가의 초상과 매화를 그려 선물로 주었다. 다음은 박제가의 초상을 그리고 화면에 쓴 나빙이 화제(畫題)이다.
“삼천리 밖의[조선] 사람을 맞이하여,
기꺼이 만나 아름다운 선비의 초상을 그렸네.
아름다운 풍취를 사랑하노니 장자 무엇에 견주리.
매화가 변하여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무엇 때문에 그대 만나기를 일삼아 벗이 되었던가
갑자기 이별의 말 들으니 내 마음이 아프네.
이제는 그대를 담막하게 보아야 하니
오직 이별의 정이 가장 슬프다네.
이미 묵매를 그려 증정하였다. 또한 다시 그를 위해 초상을 그려 두 절구를 지어 이별을 기리고자 한다. 건륭 55년(1790년) 8월 18일 양주사람 양봉도인(兩峯道人, 나빙의 호)이 경사[北京] 유리창 관음각에 머물며.”
相對三千里外人 欣達佳士寫來真
愛君丰韻將何比 知是梅花化作身
何事達君便與親 忽聞別我話酸辛
從今淡漠看佳士 唯有離情最槍神
(既作墨梅奉贈, 又復爲之寫照, 因作是二絶, 以誌別云. 乾隆五十五年八月十八日, 揚州 兩峯道人 時客京師琉璃廠之觀音閣)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우정이 꽤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나빙이 그린 박제가는 41세로 오른 손에 부채를 들고 넓은 깃털을 단 전립을 쓴 군관 복장으로 내면에 흐르는 맑은 성정과 단아한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의의와 평가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며 개성이 강한 광, 괴, 기 등으로 평가를 받는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나빙과 박제가가 북경에서 친교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용어해설
양주팔괴(揚州八怪): 양주팔괴는 청나라 중기에 양주지방에서 활약한 화가들을 통칭하는 데 주로 나빙(羅聘, 1733~1799)·정섭(鄭燮, 1693~1765)· 금농(金農, 1687~1763)·이방응(李方膺, 1695~1755)·황신(黃愼, 1687~1770)·왕사신(汪士愼, 1686~1759)·이선(李鱓, 1686~1762)·민정(閔貞, 1730~1688)·고상(高翔, 1688~1753)·변수민(邊壽民, 1684~1752)·고봉한(高鳳翰, 1683~1748)·화암(華喦, 1682~1756)·진찬(陳撰, 1678~1758) 등을 지칭하는데 나빙은 십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화가로서 이력이 본격화된 것은 금농과 사제 관계를 맺은 24세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나빙은 양주 지역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후기에는 양주와 북경을 왕래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1771년 39세의 나이로 새로운 후원자를 찾기 위해 북경에 처음 방문했으며 이때 북경 유리창 관음사에 기거하며 박제가를 만나 교유했다.